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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의 김정호보다 16년 먼저 조선지도를 그린 한국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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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의 김정호보다 16년 먼저 조선지도를 그린 한국 사람이 있다?

김대건 신부, 1845년 서양식 로마자 표기 '조선전도' 제작 공개돼

조선의 젊은 신부, 김정호보다 앞서 정교한 지도 제작에 성공하다

1861년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보다 16년 앞선 1845년, 당시 24세의 젊은 천주교 신부 김대건이 '조선전도'라는 지도를 제작했다는 사실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이 지도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가 1979년 최석우 신부에 의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으며,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단행본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연구'를 통해 그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김대건 신부
김대건 신부

선교사들을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 제작된 조선전도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는 서울의 관부에 보관되어 있던 정상기(1678~1752)의 '동국지도'를 모본으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중국에 머물다 1845년 1월 조선으로 돌아온 뒤 같은 해 4월 중국 상하이를 향해 출발할 때까지 약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 지도를 완성했다.

조선전도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의 지명이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울은 'Seoul'로, 울릉도는 'Oulnengtou', 우산도(독도)는 'Ousan'으로 표기되었다. 이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돕기 위한 실용적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지도는 1846년 심부름꾼을 통해 변문에서 대기하던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에게 전달되었다.

지도학적 가치와 독도 표기의 의미

조선전도는 만주의 봉황성에서 의주 변문까지의 육로와 한강 하구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 일대의 해로를 상세히 담고 있다. 또한 각 지방의 감영, 병영, 수영 등 주요 행정·군사 중심지를 표시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동해의 울릉도 옆에 '우산'이라고 표기된 독도가 포함되어 있고, 간도로 추정되는 압록강·두만강 북부 일정 지역이 별도의 경계선 안에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김대건 신부의 명확한 영토의식을 보여주는 증거로 평가된다.

비록 일부 지역의 경계나 관부 위치, 강의 지류 등이 부정확하거나 누락된 미완성 상태였지만, 당시 서구에 알려진 당빌이나 지볼트의 조선지도보다 훨씬 더 많은 지명이 한국식 발음으로 정확하게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서구사회에 우리나라를 보다 정확하게 알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를 경험한 신학생, 지도 제작 기술을 습득하다

김대건은 10대 시절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조선에서 마카오까지 약 5,000km를 6개월에 걸쳐 도보로 이동하는 대장정을 경험했다. 그곳에서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를 접하며 자신이 걸어온 길과 조선의 위치를 처음으로 시각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선교를 위한 교육 과정에 포함된 지도 제작 수업을 통해 제작술을 익힌 그는 귀국 후 선교사들을 위한 조선전도를 완성했다.

조선전도의 역사적 여정과 재발견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는 그의 동료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해군 그라비에 함장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1855년 프랑스 왕립도서관(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으며, 같은 해 프랑스 지리학회지를 통해 유럽에 소개되었다. 이 지도는 프랑스 해군 지도창과 수로국을 거쳐 현재는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978년 최석우 신부에 의해 발견되어 그 존재가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1979년 최석우 신부는 파리국립도서관 지도부에 보관된 지도를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국내 학계에 소개하고, 원본(축척 1,981,500분의 1)보다 축소된 가로 48.5cm, 세로 88cm 크기로 복원 제작하여 '조선전도'라는 제목을 붙여 간행했다.

조선전도
조선전도

한국 첫 신부의 또 다른 업적, 지도 제작

김대건 신부는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자 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들의 호칭 시 제일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다. 또한 202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념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지도 제작 업적은 종교적 활동 외에도 한국 지도학의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더한 중요한 공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Seoul'이라는 명칭을 알파벳으로 최초 표기했다는 점은 한국의 수도를 세계에 알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한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명확히 표시한 점은 오늘날 한일 간 영토 분쟁에서도 역사적 증거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김정호와 김대건, 다른 시대적 배경과 목적의 지도 제작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가로 길이만 3.8m에 달하는 대형 지도로 국내 사용을 위해 한자로 제작된 반면, 김대건의 조선전도는 서양 선교사들의 사용을 위해 로마자로 표기된 실용적 지도였다. 두 지도는 제작 목적과 형태는 달랐지만, 모두 당대의 조선을 상세히 기록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김대건 신부의 지도는 19세기 중반, 서구 사회에 한국을 보다 정확하게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독도를 포함한 조선의 영토를 명확히 표시함으로써 한국의 영토 주권을 세계에 알린 중요한 증거물이 되었다.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

결론: 다시 조명받는 김대건 신부의 지도 제작 업적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김정호보다 16년 앞서 조선 전도를 제작한 김대건 신부의 업적은 한국 지도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비록 그의 생애는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순교로 마감되었지만, 그가 남긴 조선전도는 한국의 지리적 인식과 영토 의식을 세계에 알린 소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한국 역사에서 종교인으로만 기억되던 김대건 신부가 지도 제작자로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의 다재다능함과 애국심을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특히 독도를 명확히 조선의 영토로 표시한 그의 지도는 현대의 영토 논쟁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증거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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